주일설교

2025년 9월21일 주일설교: "바알과 아세라를 베어내고 언약의 신실함으로"

작성자 세빛교회 댓글 0건 조회 59회 작성일 25-09-21 08:47
설교 제목
“빛과 시간, 그리고 즉시성의 유혹: 바알과 아세라를 베어내고 언약의 신실함으로”
본문
창세기 1:1–5, 14–19
사사기 2:11–13; 3:5–7
(참고) 신명기 11:10–17, 호세아 2:5,8, 열왕기상 18장, 이사야 44장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의 힘’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그 힘에서 자유케 하시는지를 함께 보려 합니다

즉시성의 시대
여러분, 우리는 ‘즉시성’의 시대를 삽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수치가 뜨고, 좋아요 숫자와 조회수, 수익 그래프가 오르내립니다. 보이면 안심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이 갈증이 신앙에도 스며들면, “기도하면 곧 표적이 떠야지”, “이만큼 드렸으니 이 정도는 와야지”라는 거래 감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제는 현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이스라엘도 똑같이 ‘보이는 것, 빨리 오는 것’에 끌려갔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유혹을 이렇게 한 마디로 묶습니다. “바알들(בְּעָלִים)과 아세라들(אֲשֵׁרִים).”

바알과 아세라의 유혹
왜 복수형일까요? 바알은 ‘주인/지배자’라는 뜻을 가진 가나안의 비와 폭풍, 풍요의 신이었는데, 지역마다 바알-브릿, 바알-그릿처럼 현지 분신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모신(母神)으로 여겨졌고, 바알 혹은 ‘엘’의 배필로 숭배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세라들”은 여신 자체이기도 하고, 그 여신을 상징하는 목제 기둥—아세라 목상—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스다롯(Ashtaroth, Astarte/Ishtar)도 등장하는데, 아세라와는 다른 여신이지만 둘 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어서 고대의 사람들에겐 하나의 세계관으로 엮여 보였을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갔는가?
이유는 명확합니다.
농경의 불안
가나안 땅은 비에 생존이 달려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풍년, 닫히면 흉년입니다. 바알은 비를 가져오는 신으로 알려졌고, 흉작과 가뭄이 올수록 백성은 ‘지금 당장’ 효험이 느껴지는 의례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가시성과 조작감
야웨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두지 말라는 뜻이죠.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다릅니다. 목상과 기둥, 제단과 축제가 있고, 정해진 의식을 치르면 내가 무엇인가를 ‘작동’시키는 듯한 감각이 듭니다. ‘의례–대가’ 구조는 신을 경외하는 믿음보다 훨씬 손에 잡히는 기술처럼 느껴집니다.
사회·정치적 동화 압력
정복 이후 원주민과 섞여 살며, 혼인과 교역을 이어가자 현지 신앙은 일종의 관계 유지 비용이 되어버렸습니다.
감각적 매력
어떤 성소들은 의례 자체가 쾌락과 연결되어, 종교적 정당성을 입은 쾌락이 사람을 유혹했습니다.
혼합주의의 착각
대부분은 야웨를 버린 게 아니라 ‘야웨도 섬기고, 바알도 조금’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꾸짖었습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바알의 선물로 오해하지 말라고, 언약의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라고.

보이는 힘의 한계
여러분, 그 의례들로 즉각 기적이 터졌을까요? 고대인은 의례와 자연 현상, 비와 수확을 인과로 연결해 해석했습니다. 실제로는 계절과 기후의 결과인데, 축제와 제사가 곧 효험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보이는 상징물, 가시적인 제의, 농사 주기와 맞물린 축제는 신경을 자극하는 강한 피드백을 줍니다. 그러니 마음은 더 빨리 안심을 찾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확실하게 진단합니다. 창조주를 버리고 피조물을 주술화한 행위, 언약 대신 기술을 붙드는 배교, 부분 순종과 혼합주의의 결과로 몸에 박힌 가시라고 말입니다. 형상은 만들 수 있지만, 섬기지 않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창세기의 빛과 시간
이제 시선을 창세기의 첫 장면으로 옮겨 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등장하는데, 첫째 날의 빛은 아직 광명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시작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며 시간의 리듬, 질서를 여셨다는 뜻입니다. 빛이 오자 구획이 생기고, 구획이 생기니 순환이 가능해지고, 순환이 가능하니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넷째 날에 오면 해와 달과 별이 그 시간을 ‘표징’하게 됩니다. 계절과 날과 해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씨 뿌림과 거둠, 더위와 추위, 여름과 겨울이 그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질서 안에서 성숙이 자라도록 시간을 주십니다.

시간의 신학
여기서 중요한 고백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최초의 질서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씨—기다림—수확이라는 시간의 신학, 창조의 리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의 성품이 익어가는 데, 관계가 회복되는 데,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지만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시간에 갇힌 분이란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시기도 하고, 은혜로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임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간이 적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다림은 벌이 아니라 빚어짐입니다.

오늘의 즉시성 유혹
이 진리를 붙들면 사사기의 유혹도 분별됩니다. 왜 사람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갔는가? 빨리 보이고, 내가 조작 가능한 종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수치와 성과가 내 정체성을 증명해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조회수와 KPI, 시세 차트와 잔고가 눈에 보이면 가슴이 누그러지고,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까지 작동시키려 듭니다.
“주님,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는 주셔야죠.”
이건 기도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말이 경건해 보여도 마음은 아세라 목상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빨리 오는 것, 조작 가능한 것—이 모든 것이 한 가지를 겨냥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를 ‘기술’로 바꾸라는 유혹입니다.

아세라 목상을 베어내라
그러면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먼저 마음속 아세라 목상을 베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도구이지, 주인이 아니다.”
이 문장을 오늘 우리 심령에 새깁시다.
주간에 한 번쯤 성과 지표를 확인하지 않는 날을 정하고, 그 시간을 말씀과 기도, 이웃을 격려하는 일로 채우십시오.
원칙을 선포하십시오. “오늘 나는 결과를 조작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의 길에 작은 순종을 선택한다.”
사람을 수단화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임계점은 놀랍도록 낮습니다. 짧은 격려 메시지 하나, 10분의 중보기도 하나, 무의미한 스크롤 30분을 끊는 결단 하나가, 내면의 주인을 갈라놓습니다.
그 순간 나는 바알의 기술을 내려놓고, 언약의 신실함으로 되돌아갑니다.

기다림의 영성
기다림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리듬을 만들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으로 리듬을 여셨듯, 우리도 기도—일—쉼—나눔의 호흡을 주간 달력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공을 위한 루틴이 아니라, 신뢰를 배우는 도장입니다. 작은 순종을 하나 정하세요.
매일 10분 말씀 앞에 서기.
매주 한 번 이웃에게 선물과 함께 격려의 말을 건네기.
매달 한 번 화해의 시도를 해 보기.
그리고 감사 일지를 쓰세요. 싹이 틀 때마다 기록하십시오. “오늘 내 마음에 빛이 스며든 순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될 것입니다. 크로노스—흘러가는 시간—을 성령께서 카이로스—하나님의 기회—로 바꾸고 계시다는 것을.

작은 표징을 보는 믿음
혹시 누군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저는 빨리 응답이 필요합니다.”
이해합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하늘은 닫혔고 땅은 갈라졌습니다. 갈멜산 정상에서 불이 떨어지는 장면은 한순간이었지만, 그 뒤에 비가 오기까지 엘리야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일곱 번이나 사람을 보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작은 손바닥만 한 구름이 보입니다.”
그 작은 표징을 보고 엘리야는 서둘러 말합니다. “큰 비가 내리려 하니 수레를 준비하라.”
이것이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즉시성의 쾌감이 아니라, 작은 표징을 알아보고 큰 순종으로 달리는 믿음.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오늘의 결단
여러분의 삶에서 오늘 끊어야 할 아세라 목상은 무엇입니까? 숫자 중독입니까? 비교 습관입니까? ‘예수 + 무엇’이어야 안심이 되는 혼합주의입니까?
오늘 결단합시다. “나는 보이는 즉시성의 바알을 끊고, 언약의 신실함을 택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간을 통해 자라게 하시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은 예수님과 성령의 은혜입니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언약의 신실함을 몸으로 살아내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시간을 새 창조의 시간으로 여셨습니다.
성령은 지금 여기 임하여 새 마음을 주시고, 사랑과 절제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림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무시하지도, 시간에 예속되지도 않습니다. 시간을 존중하되, 은혜를 의지합니다. 서두르지 않되, 늦지 않습니다. 작은 씨앗을 심고, 작은 표징을 보고, 큰 순종으로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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